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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책소개

    기존의 연구들은 남북접 동학군의 1894년 공주 점거투쟁을 ① 전봉준 등 ‘남접’ 중앙지도부가 ② 자신들 나름의 지도사상과 통일적 강령을 가지고 ③ 호남 ‘농민군’의 혁명적 폭력을 동원·규합하여 ④ ‘농민전쟁’을 도모한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이런 기존의 주류 경향을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이라 규정한다. 이는 물론 나름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한 일종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종의 혁명전통론(호남 의향론, 민주화 성지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낡은 분석방법이자 역사상일 따름이다. 농민전쟁론에 따르면,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객관조건이나 주체역량이 미숙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문화를 반영한 도회이자 의거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조선왕조 역사의 큰 흐름을 뒤바꾼 대파국(great catastrophe)의 서막, 즉 길게 보면 결국은 승리한 투쟁이었다.

     

    공주 점거투쟁 시기 조선왕조 정부(조야 유생)와 동학군은 무엇이 당대의 인의(仁義)이고 민본(民本)인가, 달리 말하면 동학군의 봉기가 의거(義擧)인가 패거(悖擧)인가를 다투는 대의명분 싸움을 벌였다. 이 책에서 필자가 황토현이나 우금티싸움과 같은 물리적 충돌 사건보다 동학군의 모이고 모으는, 점거하고 담판하는 정치적 힘, 특히 남북접 동학군이 조선왕조 정부와 조야 유생들과 벌인 말 잡기 싸움을 더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기존의 연구들은 남북접 동학군의 1894년 공주 점거투쟁을 ① 전봉준 등 ‘남접’ 중앙지도부가 ② 자신들 나름의 지도사상과 통일적 강령을 가지고 ③ 호남 ‘농민군’의 혁명적 폭력을 동원·규합하여 ④ ‘농민전쟁’을 도모한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이런 기존의 주류 경향을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이라 규정한다. 이는 물론 나름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한 일종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종의 혁명전통론(호남 의향론, 민주화 성지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낡은 분석방법이자 역사상일 따름이다. 농민전쟁론에 따르면,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객관조건이나 주체역량이 미숙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문화를 반영한 도회이자 의거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조선왕조 역사의 큰 흐름을 뒤바꾼 대파국(great catastrophe)의 서막, 즉 길게 보면 결국은 승리한 투쟁이었다. 공주 점거투쟁 시기 조선왕조 정부(조야 유생)와 동학군은 무엇이 당대의 인의(仁義)이고 민본(民本)인가, 달리 말하면 동학군의 봉기가 의거(義擧)인가 패거(悖擧)인가를 다투는 대의명분 싸움을 벌였다. 이 책에서 필자가 황토현이나 우금티싸움과 같은 물리적 충돌 사건보다 동학군의 모이고 모으는, 점거하고 담판하는 정치적 힘, 특히 남북접 동학군이 조선왕조 정부와 조야 유생들과 벌인 말 잡기 싸움을 더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저자
    지수걸
    출판
    역사비평사
    출판일
    2024.09.27

     

     

    실패한 ‘전쟁’인가 패러다임을 바꾼 ‘의거’인가
    ― 1894년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재조명


    기존의 연구들은 남북접 동학군의 1894년 공주 점거투쟁을 ① 전봉준 등 ‘남접’ 중앙지도부가 ② 자신들 나름의 지도사상과 통일적 강령을 가지고 ③ 호남 ‘농민군’의 혁명적 폭력을 동원·규합하여 ④ ‘농민전쟁’을 도모한 사건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이런 기존의 주류 경향을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이라 규정한다. 이는 물론 나름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한 일종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종의 혁명전통론(호남 의향론, 민주화 성지론)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낡은 분석방법이자 역사상일 따름이다. 농민전쟁론에 따르면,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객관조건이나 주체역량이 미숙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지만,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문화를 반영한 도회이자 의거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조선왕조 역사의 큰 흐름을 뒤바꾼 대파국(great catastrophe)의 서막, 즉 길게 보면 결국은 승리한 투쟁이었다.
    공주 점거투쟁 시기 조선왕조 정부(조야 유생)와 동학군은 무엇이 당대의 인의(仁義)이고 민본(民本)인가, 달리 말하면 동학군의 봉기가 의거(義擧)인가 패거(悖擧)인가를 다투는 대의명분 싸움을 벌였다. 이 책에서 필자가 황토현이나 우금티싸움과 같은 물리적 충돌 사건보다 동학군의 모이고 모으는, 점거하고 담판하는 정치적 힘, 특히 남북접 동학군이 조선왕조 정부와 조야 유생들과 벌인 말 잡기 싸움을 더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왜 공주를 점거하고자 했나
    ― 서울 진격이 아닌 공주 점거를 택한 이유: ‘광장’으로서의 공주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현실투쟁의 목표를 서울 진격이 아니라 공주 점거로 설정한 것은 1차 봉기 시기 전주성 점거와 담판 경험 때문이었다. 전주성에서 동학군은 군중집회와 무장시위 등을 통한 대중적인 어셈블리(모이고 모으기) 투쟁에 힘입어 전주성을 전격적으로 점거할 수 있었다. 전주성을 점거한 뒤 지도부가 전라감사, 초토사, 순변사 등을 상대로 나름의 정치협상이나 담판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명분이 뚜렷했을 뿐만 아니라 호남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이 그만큼 크고 넓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험에 기초해볼 때, 남북접 지도부가 일본군과 관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있는 유일한 대안은 남북접 동학군이 연대하여 공주를 점거한 뒤 일본과 조선 정부를 상대로 정치협상이나 담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공주는 당시의 정세와 조건을 감안할 때 남북접 동학군이 선택할 수 있는 A/O 투쟁의 최적지였다.


    한국사 교과서처럼 공주 점거투쟁을 서울 진격을 위한 중간전투로 이해할 경우, 점거 대상이 왜 하필 공주였을까라는 질문은 우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정학적 특성상 진입과 점거가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남북접 동학군이 한 달여 동안 총력을 기울여 공주 점거전을 벌인 이유는, 당시의 조건과 정세를 감안할 때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적절한 도회처, 즉 A/O 투쟁의 적지(適地)가 바로 공주이기 때문이었다.

     

     

    “죽이지 말고, 헤치지 말고, 살아가며 싸우자”
    ― 용감한 투쟁과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집단학살의 결과


    공주 점거투쟁 실패 이후 남북접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섬멸전에 대응하여 퇴각을 서둘러야 했다. 태인싸움(11월 27일)을 끝으로 전봉준이 동학군의 해산을 선포했고, 이는 공주 점거투쟁이 공식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피해 땅끝까지 내몰린 동학군은 장흥, 해남 등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일본군과 관군, 수성군과 민보군 등에 의해 무자비하게 집단학살되었다.


    우리 학계에서는 ‘전투 중 사망한 동학군의 숫자’를 가급적 부풀리려는 경향이 강하다. 용감한 투쟁, 숭고한 희생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전투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해산 선언 이후 귀향을 서두르던 때였다. 동학군은 무장기포 시기부터 ‘불살생 불살물’을 강조했으며, 이런 원칙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까지 이어졌다. 1894년 어셈블리 때 동학군의 최고 강령(大義)은 무엇을 위해서든 노부모와 처자식을 남겨둔 채 죽는 짓, 특히 순교나 순국은 생각조차 말라는 것이었다. 1894년 어셈블리와 관련한 ‘순국과 순교’, 또는 ‘영웅적 투쟁과 숭고한 죽음’의 이미지는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필요할 때도 있었을 것이나, 오늘날까지도 이를 강조하는 것은 교훈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다.

     

     

    집단적 공감과 감응을 매개로 모이고/모으는 사람들
    ― ‘광장’에서 펼쳐지는 ‘공감’의 연대, 도회·의거의 전통


    19세기 후반에 형성·발전된 도회·의거 전통에 기초해보면, 공주 점거투쟁의 기본 성격은 A/O 투쟁, 즉 assembly(모이기 모으기)/occupy(점거하고 담판하기) 투쟁이었다.


    공주 점거투쟁의 특징은 동학군이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모아 특정한 장소를 점거한 후 더 큰 모이기 모으기 투쟁을 전개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군의 A/O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동학군의 근거지를 각개격파함과 동시에 항일연대를 방해하는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등이다.


    1894년 어셈블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정치문화의 큰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집단적인 공감과 감응을 매개로 한 모이고/모으는 투쟁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1차 투쟁에 패배한 이후 전봉준이 스스로 ‘사문(師門)의 죄인’이라 자기 비판하자, 북접 지도자들은 이에 감응하여 최시형의 유시까지 어겨가며 함께 우금티싸움을 벌였다. 그것은 전봉준의 자탄과 호소, 또는 공주 점거투쟁 자체가 가진 정동되고/ 정동하는 힘 때문이었다. 최근 정동론(情動論)이나 감성장론(感性場論) 관련 연구성과들이 강조하듯이, 몸과 몸이 서로 마주쳐 어우러질 때 긍정적 감응은 또 다른 감응과 사건을 낳는 법이다.

     

     

    근대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의 보물창고
    ― 촛불광장에 앞서 공주의 동학군이 있었다


    1894년 어셈블리, 특히 최시형의 폭거중지 혁심개도 유시에 기초한 공주 점거투쟁은 일본군과 관군의 폭력에 대응한 ‘자기-방어’이자 일종의 ‘윤리적 대안’이었다. 김용옥과 백낙청이 1894년 어셈블리와 촛불 어셈블리의 연관성을 논의하면서, 동학의 ‘수평적 민본사상’을 토대로 서양의 근대나 민주주의론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촛불혁명은 ‘지도자 없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정의로운 에너지를 분출한 사건’이었다는 지적도 이 책의 핵심 논지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도회·의거 전통, 특히 동학의 ‘수평적 민본사상’이나 ‘생명사상’ 등에 기초하여 1894년 어셈블리의 성격과 의미를 논의하는 경우, 기존의 연구와는 전혀 다른 역사 해석이 가능하다. 1894년 어셈블리, 특히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 과정에서 형성된 민중들의 긍정적 감응은 근대적인 의미의 민중 혹은 민족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근대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의 보물창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