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심리학자이자 과학적 회의론자로 현대 문화, 심리학, 심리 치료에 도사린 사이비 과학을 폭로하는 토마시 비트코프스키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에 거침없는 펀치를 날린다. 그에 따르면 좋은 삶의 기준을 결정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이데올로기다.
비트코프스키는 ‘모든 사람은 다르다’라고 떠벌리는 자들을 가짜 휴머니스트라고 일갈한다.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관심을 구하는 미친 경쟁을 폭로한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자기 계발 방법을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인플루언서 구루들을 끌어내린다. 자살을 비겁으로 낙인찍는 문화와 성범죄에 무죄 따윈 없다는 정의로운 폭도들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비트코프스키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심리 치료의 사기 역시 까발린다. 치료 문화의 부상과 가짜 휴머니스트의 합작으로 600가지가 넘는 치료 학파가 난립하게 된 기괴한 현실과 성격이 암을 만든다고 사기를 치는 위대한 심리학자를 조명한다.
비트코프스키는 왜 안전한 현실의 장막을 벗겨내는가? 삶의 기준은 의심하고 회의하는 당신이 직접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생명이 죽음을 향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척도에 따라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어떤 전문가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회심리학의 대가, 로이 F. 바우마이스터의 서문 수록
“토마시 비트코프스키의 책은 문화란 세상에 대한 진실된 비전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이라는 안일한 개념을 맹렬히 비판한다.”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신경과학의 거장, 조지프 르두의 추천
“독자가 든 이 책은 심리학의 어두운 측면에 초점을 두어 과거와 현재의 권위자에 의해 형성된 독단적 믿음과 학설이 현장에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방식을 파헤친다,” -조지프 르두
과학 실험의 재현성에 의문을 던진, 심리학의 거장 브라이언 노섹 추천
“이 도발적인 책에서 토마시 비트코프스키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 사이의 투쟁, 특히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조명한다. 비트코프스키는 필력이 뛰어나고 증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가는 열정으로 피해자 되기, 자살, 거짓 고발과 같은 도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브라이언 노섹
그놈의 ‘갓생’은 누가 만들었을까
사기를 쳐도 과학으로 포장해 치는 자기 계발 구루들
단 한순간도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이른바 ‘갓생’살이가 열풍이다. 소셜 미디어와 언론에서는 심리학자, 심리상담가, 정신과 의사, 인플루언서 들, 이른바 ‘구루’들이 출연해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어떤 방법을 쓰면 자신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고 멋진 성취를 이룬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설파한다. 그들의 셀링 포인트는 ‘과학’이다. 이른바 근거 기반 자기 계발. 유행하는 다이어트 기법보다는 과학에 근거한 다이어트 조언을 따르는 것, 엄마의 조언보다는 정신과 의사가 알려주는 육아법, 친구보다는 심리학자가 알려주는 공부법이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토마시 비트코프스키는 단호히 말한다. 과학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며 그럴 수도 없다고. 과학은 자아 실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왜 그럴까? 좋은 삶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구루들이 설파하는 조언 중에서 짧지만 굵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조언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문화는 장수하는 삶이 굵게 사는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의 목표에서 다음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을 찾을 뿐 놀랍고도 파격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회가 우리에게 내리는 문화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색이나 휴식, 기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내 ‘집중력을 도둑맞는’ 것이라 여기며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런 행동은 치료가 필요한 일종의 장애, 일중독으로 정의되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모두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는 조언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만 우리의 삶이 좋은 삶인지 평가할 수 있다.
과학은 사실만 얘기할 수 있을 뿐 어떤 규범적 판단도 할 수 없다. 과학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얘기할 수 있어도 “그러므로 우리는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극한의 감정을 경험하며 혼자서 전 세계를 항해한 사람의 삶이 최상의 건강을 유지하며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삶보다 더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을 제시하는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그리고 심리학의 세례를 받은 동기 부여 연사는 그저 자신의 부를 위해 가짜 믿음을 파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점점 미디어가 주는 후광을 통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사는 법에 관한 조언을 독점하는 ‘구루’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들의 조언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인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있다. 그러나 실은 구루들도 어떤 게 올바른 삶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토마시 비트코프스키는 말한다. “여러분에게 사는 법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나이, 직위, 학력, 지위, 성별, 재산, 직책에 관계없이 무조건 조심하라. 여러분의 생명이 죽음을 향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척도에 따라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어떤 전문가도 당신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을 거부하라.”(54쪽)
이제 인정하세요, 가짜 피해자와 날조된 가해자가 있다는 것을
2013년 8월 2일, 영국 레스터셔에 사는 14세 소녀 해나 스미스가 인터넷에서 괴롭힘을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해나가 이용하던 소셜 미디어 측에서 조사를 방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사이버 괴롭힘이 자살의 원인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 해나가 받았던 공격적인 메시지가 바로 자기 자신이 보낸 것이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흑인 배우 주시 스몰렛은 남성 2명을 고용해 자신을 공격하게 한 후 2019년 1월 29일 자신을 인종차별 및 동성애 혐오 공격의 피해자로 경찰에 직접 거짓 신고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전주에 받은 협박 편지 역시 스몰렛이 보낸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이런 일이 소수의 사례처럼 보이는가? 미국의 정치학자 윌프레드 라일리는 미국에서 벌어진 346건의 증오 범죄 혐의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 진짜 증오 범죄는 3분의 1 미만임을 밝혀냈다. 2012년 미국 브리지워터주립대학교의 엘리자베스 잉글랜더는 617명의 고등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10%에 달하는 10대 청소년(여학생 8%, 남학생 17%)이 온라인상에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히 피해자가 되려는 미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는 피해자 문화의 부상으로 인간의 어두운 충동에 대해 눈 감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그저 관심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피해자 행세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감히 입에 담으려 하지 않으며 피해자를 의심한다는 것조차 불경한 일로 생각한다. 피해자에게 도덕적, 사회적 특권이 주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당한 방식으로 피해자 역할을 악용하는 것은 아주 널리 사용되는 조작이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로 상처를 받아서 다른 사람의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빼앗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심리학자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피해자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고귀한 역할을 자임하면서 오히려 날조된 피해자를 양산하고 거기서 이득을 취하고 있다. 비트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오늘날, 우리 삶에서 무언가 잘못되면 우리는 현대 심리 비즈니스가 제공하는 역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건 모든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거대하고 다채로운 시장 매대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부모가 알코올을 남용했다면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 자란 성인 아이로서 알코올 중독의 피해자로 살 수 있다(정신 질환 진단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부모님이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여전히 잘 풀리지 않는 삶의 이유에 대한 설명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역기능 가족의 성인 아이 증후군에 해당할 수 있다. 그래도 효과가 없다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면 된다.”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날조된 피해자 못지않게 날조된 가해자도 양산되고 있다. 사람들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성희롱 고소의 최대 10%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혼 소송의 경우 전체 고소의 최대 30%까지 허위일 수 있다고 한다. 1987년에서 1995년 사이에 미국에서 수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고된 아동 성학대 사례 중 허위 고소의 비율은 6%에서 35%에 달했다. 1992년 메타 분석에 따르면 성희롱에 대한 허위 신고가 전체 신고의 2%에서 10%를 차지했다. 캐나다에서는 교사에 대한 성희롱 고발이 유행처럼 번진 후 10년 만에 전체 남성 교사의 거의 절반이 교직을 떠났다. 특히나 소아 성범죄 같은 혐오스러운 범죄는 여론의 불같은 분노를 이끌어 내고 사법기관은 신속하게 희생양을 찾는다. “무고한 사람 몇 명을 유죄로 판결해 버리는 편이 더 낫다…”
비트코프스키는 이러한 우리 사회가 정말 문명화된 사회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심리학자 같은 과학자는 이런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편승해 버렸다. 그들은 법정에서 잉크 반점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사람의 깊은 심리를 들여다보는, 그러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고 아무런 공신력도 없는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의 전문가 증인으로 참석한다. 그들은 목격자의 기억이 얼마나 취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지 알면서도 스스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성범죄를 당했다는 거짓 기억을 심어 무고한 부모들의 평생을 망쳐버렸다. 비트코프스키는 되묻는다. 혹시 당신은 그러한 억울한 누명을 쓴 당사자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안온, 무해, 다정하지만 하등 쓸모없는 말, 모든 사람은 달라요!
모든 사람은 다르다고 떠벌려야 돈을 버는 가짜 휴머니스트들
이처럼 비트코프스키는 아주 그럴듯하고 정의롭고 자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문명과 사회를 퇴행시키는 거짓 믿음의 구조를 들춰낸다. 제발, 당신은, 이런 믿음이 정말로 근거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비트코프스키가 가장 경멸하는 건 다양성을 찬양하며 “모든 사람은 다르다”라고 떠벌리는 휴머니스트다. 그들은 가짜 휴머니스트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라는 선언은 심오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각자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따뜻한 말처럼 들리지만 관용 이외에 이 말이 실제로 과학적 발견에 기여한 건 없다.
비트코프스키는 가상의 사례 하나를 든다. 성적을 향상할 수 있는 최선의 교육 방법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한 사람이 말한다. “교육에서는 XYZ 접근법이 결과가 가장 좋아. 통계적으로 많은 학생의 성적이 짧은 기간 동안 최소 20%씩이나 향상되었거든.” 이에 두 번째 사람이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학생은 다르고 각자의 상황도 다르다는 점이야. 그러니 우리는 무턱대고 한 가지 방법을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어.” 두 번째 사람은 아무런 새로운 의견을 내지 않았음에도 심리적으로 우위를 차지한다. 첫 번째 사람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서랍 안에 쑤셔 넣으려는 사람이지만 두 번째는 이해심 많고 관대해서 학생들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은 성적이 20% 향상되는 결과를 낳는 해결책을 제시한 반면에 두 번째는 그를 비웃었을 뿐 응당한 해결책은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가짜 휴머니스트는 정책적 제안이나 치료 방법, 심리 치료 요법, 협상 방법, 직원의 사기 진작법, 재활 기술을 포함해 수백 개가 넘는 다른 효과적인 방법을 다 부정해 버린다. 가짜 휴머니스트가 이렇듯 묵살을 일삼는 근거는 그런 제안이 한 명을 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몇몇 가짜 휴머니스트가 “나는 수학을 몰라”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반복하는가 보다.“(29쪽)
가짜 휴머니스트는 무엇보다 심리 치료에서 엄청난 사기를 쳤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는 믿음으로 600개가 넘는 심리 치료 학파를 창조한 것. 심리 치료사는 심리 치료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궤변을 펼치며 자신들도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심리 치료 접근법을 지금도 만들어 내고 있다. 피해는 온전히 환자들이 뒤집어 쓴 채 말이다.
어쩌면 냉혈한으로 욕먹을까 봐 던지지 못했던 그 질문
심리 치료는 효과가 있는가?
오늘날, 심리 치료는 우리 문화의 필수적인 의료적 개입으로 자리 잡았다. 트라우마 같은 용어가 일상화되고,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어떤 사람이 일상에서 크고 작은 사건을 겪고 힘들어 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심리 치료를 권한다.
그러나 토마시 비트코프스키는 심리학자로서 심리 치료라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통렬히 비판한다. 누구도 묻지 못했던 그 질문. 심리 치료는 효과가 있는가?
심리 치료 분야의 제일 큰 문제는 600가지가 넘는, 때로는 그 방식이 24개 손가락으로 머리를 감겨주는 파나소닉의 로봇처럼 기괴하고 쓸모없는 치료법이 계속 생산되는 데도 그 효과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는 활동 중인 심리 치료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또한 얼마나 많은 환자가 심리 치료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환자가 심리 치료를 완료했는지, 또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치료 기법과 이를 가르치는 학파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도 전 세계 어디에도 그 수에 대한 면밀한 자료가 없다. 어떤 심리 치료 방법은 학위를 요구하는 반면, 어떤 심리 치료 방법은 온라인 교육 수료만으로 활동이 가능하다.
2017년 심리 치료의 효과에 대한 메타 연구가 발표되었다. 그리스의 심리학자 에반겔로스 에반겔루Evangelos Evangelou와 연구진은 가장 높은 방법론적 기준을 충족하는 심리 치료의 효과에 대한 5000건 이상의 연구를 분석했다. 그 연구들을 정밀하게 살펴본 결과 심리 치료의 긍정적 효과가 확인된 연구는 그중 단 7%뿐이었다.
독립적으로 수행된 여러 분석에서 정규 치료사는 심리 치료 지침이 명시된 교재를 알고 있고 어떤 방법이 과학적으로 문서화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으며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몰래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을 시행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환자들이 정규 지침에 따라 심리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그 실행 방법이 교재에 나와 있는 것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더구나 심리 치료 후에 명백히 부작용이 있을 것임에도 이에 대한 연구 결과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치료사와 환자 사이에는 책임의 비대칭성이 너무나 크다. 치료사는 자신의 치료로 환자가 잘못된 경우에도 치료의 주관성 때문에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모르쇠하고 있으며 실제로 의료 소송으로 재판을 받아 책임을 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은 권위를 통해 사제와 같은 역할을 맡아 우리에게 좋고 나쁜 것,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결정하지만 무언가 잘못되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도망간다. 이런 현실은 환자에게 또 다른 낙인을 찍어버린다. “내가 인터뷰한 환자 중 일부는 치료사협회와 윤리위원회뿐만 아니라 검찰과 법원에도 불만을 제기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례에서 이 환자들의 주장은 정신 질환 환자가 쏟아내는 이야기로 간주되어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았을 테니까!”(228쪽)
2012년 미국심리학회는 투표를 통해 심리 치료는 효과가 있으며 비용 효율성도 높아 의료 서비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비트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심리치료사협회에서 이 결의안을 인용하고 있다. 이 결의안을 만든 사람 중에는 저명한 심리 치료사와 과학자도 있었는데 아무리 순화해 표현해도 이런 행태는 오만하기 짝이 없다.”(231쪽)
과학도 미신 숭배나 다를 바 없을 때가 있어요.자살을 막지 못하는 과학
토마시 비트코프스키가 멀쩡한 듯 보이는 현실의 엉망진창인 뒷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까닭은 구루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시각을 기르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다.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회자되는 대중 심리학의 사실들은 대부분은 특정한 부분만을 부각하거나 정작 보여줘야 할 것을 숨기고 있다. ‘과학’이라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까지 사회과학은 응급 처치, 정신역동적 심리 치료, 동료 지원, 사회적 돌봄, 약물 치료, 입원, 외부 통제 방법, 인지 및 행동 접근법, 변증법적 행동 심리 치료뿐만 아니라 기타 심리 치료 방법을 통해 자살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살 예방 방법에 대한 연구는 점점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오늘날 그 효과는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낮다는 것이다. 다양한 접근 방식 가운데 개입의 효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렇다 할 지표는 발견되지 않았다.”(88쪽)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없다면 자살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강변하지만 지금까지 자살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누구나 들으면 허탈할 만한 작은 것이다. 그것은 농약, 번개탄, 옥상, 지하철, 철도 플랫폼에 대한 접근 등 자살 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았던 스리랑카는 농약 사용을 통제했다. 이런 제품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정부의 노력 덕분에 스리랑카에서 자살 건수가 70%까지 감소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독성 농약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규정을 도입한 이후 비슷한 감소세가 나타났고 한국에서는 독극물로 지정된 제초제 판매가 금지되면서 이러한 유형의 자살 및 전반적인 자살률이 즉각적으로 감소했다.”(91쪽)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방식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봉책이라며 비난한다. 미디어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는 그동안 자살 보도를 보고 자살을 결심하는 ‘베르테르 효과’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말하지만 미디어 보도가 오히려 자살을 낮추는 ‘파파게노 효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이런 비효율적이고 전근대적이고 미신에 가깝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지지받는 이상한 관행이 넘쳐난다.
대중 심리학이 노리는 건 당신이라는 상품 외로우면 안 되니까 돈 쓰시고, 암 걸리니까 성격 바꾸세요.
외로움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회는 외로움을 코로나19 만큼이나 무서운 질병으로 정의하며 ‘외로움부’라는 정부 부처를 만들면서 외로움을 박멸해야 할 무서운 박테리아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런 외로움 유행병 역시 과학을 참칭하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외로움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연구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런 연구는 상관관계 연구로서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데이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의 가치는 아이스크림과 탄산수를 많이 섭취하면 폭염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의 진술과 같다. 외로운 사람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이 반드시 외로움이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170쪽)
오히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구 결과는 외로움에도 많은 장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외로움은 집중력과 인지 기능을 향상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 창의력을 강화해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홀로 살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것이 외로움을 없애려고 더 많은 사람과 늘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홀로 있으면서 홀로 있지 않으려는 존재이다.
과학을 이렇게 일면적으로 해석하고 프로파간다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대가가 치는 사기에 취약하게 한다. 비트코프스키는 한스 아이젱크라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가 친 최악의 사기를 추적한다. 아이젱크는 자신만의 성격 유형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특정 성격이 암 발병률을 예측한다는 이른바 ‘정신종양학’을 창시했다. 그러나 정신종양학은 그럴듯하기만 할 뿐, 데이터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기에 불과하다. 정신종양학 “서비스는 불치병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자신의 성격이나 믿음 때문에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안길 수 있다. 또 환자가 질병이 낫는 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영향은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암 발병의 원인을 환자 개인의 믿음이나 성격 문제로 돌리는 것은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킹스칼리지런던의 보고서를 보면 우리의 우려가 정당함을 알 수 있다. 그 연구들은 한 마디로 다 틀렸다.”(204쪽)
비트코프스키는 아이젱크뿐만 아니라 데이터 사기로 대가가 된 과학자들의 추악한 뒷면과 그런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하고 권위를 유지하려고만 하는 과학계의 몰상식함을 수면에 드러낸다. 그러면서 권위에 빠진 과학자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며 저장강박증자와 똑같은 양태를 보이는 과학에서 무언가 연구를 추가하는 ‘더하기’의 방법보다 기괴하고 이상한 연구들을 비판하고 몰아내는 ‘빼기’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과학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며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찬양하면서 그 이면에서는 자신들의 최악의 사기를 감추고 대중들에게 지식이 아니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비트코프스키의 이 모든 논의들은 세상이 맞다고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를 바탕으로 진정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신뢰할 만한 전문가를 알아보고 사람들과의 사회적 교류에서 진짜 삶의 가치를 발견하며 자신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